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방에서 나온 황시목이 어둠 속에서 한여진을 보고 있었다. “불 켤까요.” 켜고 싶으면 켜라는 여진의 희미한 대답에 황시목은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그대로 서 있기만 하는 여우를 다시 흘긋 확인한 한여진이 제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한여진이 내준 자리로 소리 없이 앉은 황시목은 왜 여기 있냐고만 낮게 묻고 말았다. 소파...
사랑은 생각보다 빨리 아주 멀리서부터 향이 퍼진다고. 도무지 숨길 수가 없다고 그가 말하자 어디서 울컥 향이 쏟아졌다. 어머니가 그 순간을 기억할 때 저장해두었을 냄새였다. 한영주를 바라보며 참다 자백하듯 열고 말았던 병. 이어받은 어머니의 기억을 꺼낼 때면 황시목은 번번이 코 끝이 간지러웠다. “이거, 놔 봐.” 일순 중심을 잃었던 한여진은 금세 평정을 ...
진작에 충격이 느껴져야 맞았다. 충돌한 부분의 통증이야 일이 다 벌어진 다음으로 따라오더라도 소리는 먼저 귀를 스치는 게 정상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부딪혀야 했던 나무가 보였다. 소리란 소리는 눈이 다 잡아먹었는지 고요했다. “한여진 씨.” 빈 산을 깬 건 다행히 품에 안은 여우였다. “한여진 씨. …팔이요.” 그때까지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안고...
한여진과 황시목이 집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세상엔 눈 뿐이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눈과 사람 하나, 여우 하나가 되었다. “음. 양심이 좀 찔리긴 하네.” “제가 밖에 나와서요?” 나란히 서서 골목 저 끝까지 둘러보던 한여진이 시선을 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래. 그 얘긴 끝난 거고.” “그럼….” “인간들은 뭐랄까 서로 이런 저런 규칙을 약속...
사냥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자고 또 잤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이미 숙지하고 있던 한여진조차 어느 순간엔 덜컥 걱정이 될 정도로 엄마는 잠에만 몰두했다. 얘기 좀 하려고 찾다보면 마지막엔 곤히 자는 엄마를 발견하고 그 옆에서 기다리다 한여진까지 잠이 들어 버리길 일쑤였다. 하루는 깜부룩 반 쯤만 아직 잠에 빠져서, 반 쯤만 깨버린 날이 있었...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자전거로 15분 거리였다.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길 한복판에서 빠져 버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보통은 그랬다. 사냥철이 끝나면 특수대는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체가 동시에 2주 정도의 휴가를 갖고 이후 곧장 동절기 단축 근무에 돌입한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 누가 들으면 되게 좋은 회산 줄 알겠다며 한여진의 팀원 중 하나는 믹스 커...
일 년 중 절반은 집에 와도 엄마가 없었다. 누군가는 새벽에 내린 서리를 만지며 계절을 체감한다고 했다. 한여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이면 보이던 창문을 헤아리며 지내는 날이 익숙했다. 저 멀리 불이 켜진 집과 꺼진 집. 오랫동안 한여진에게 계절은 둘 뿐이었다. “그럼 이름이 뭐야.” 어린 여우에게 의자 하나를 내줬다. 지치지도 않고 한여진을 빤히 올려다보...
그는 마치 확실한 방정식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일요일 점심에 짜파게티를 먹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먹는 사람은 다시 두 종류로 나눌 수밖에 없다. 계란 후라이를 올리는 사람과 올리지 않는 사람. 사냥철이 끝난 일요일 오후. 엄마는 한여진 입술에 잔뜩 묻은 짜장 소스를 한가롭게 닦아주며 물었다. — 무슨 말인지 ...
그렇게 술만 놓고 먹는 거냐고 묻던 황시목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과일을 씻어왔다. “이거 뭐. 맥준데요.” “네. 그래도요.” 골고루도 씻어 왔네. 넉넉한 바구니를 받아든 한여진은 고맙다 인사하며 적당히 달아 보이는 자두를 꺼내 들었다. “경감님.” 말하라고 우물대며 쳐다보자 황시목은 바구니에서 참외를 꺼내 깎다 흘러가듯 물었다. “지원이. 두 돌은 지나...
조심스레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도 자막만 보고 있던 TV의 소리를 아예 죽였다. 아이방에서 거실 쪽으로 나오던 황시목이 소리가 나지 않는 뉴스에 잠깐 시선을 두다 말고 섰다. “자요?” 오늘자 마감 뉴스의 두 번째 꼭지는 장관 특검이었다. 아침 뉴스부터 줄창 나왔던. 그 역시 빤할 뉴스일텐데도 혹 뭐라도 새로운 살이 붙었는가 싶었는지 애랑 자다 ...
거미를 내보내고 남은 집을 누가 치우려고 하자 한여진은 말렸다. 잠깐 좀 보자고. 애써서 참 예쁘게도 짓지 않았냐고. ‘에이 함정이니까 예쁘죠. 다른 벌레들한텐 치명적인데.’ 그런가. 함정인가. ‘근데 좀….’ 무슨 함정이 이렇게 약해. 애처롭게. 한여진은 한참 서서 그 투명한 집을 바라봤다. 입으로 연한 바람만 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집이었다....
수술실 불이 꺼지려면 한참인데 한여진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복도 가운데 못박힌 것처럼 서 있다가 지나는 간호사에게 주의를 듣고 불이 보이는 벽으로 붙어 섰다. 황시목은 별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섰다. 옷이 너무 컸다. 새벽에 황시목이 집에서 가져다준 셔츠는 연애 초반에 그가 처음으로 한여진에게 선물했던 옷이었다. 기가 막히게 딱 맞는다고 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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